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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너머로 그 사람을 바라보는 것 - <캐롤>

크리스탈 크리스 (조은별) 2022. 6. 20. 09:57

토드 헤인즈 - <캐롤>

  캐롤을 바라볼 때면, 테레즈는 항상 동경하는 눈빛에 더해 주눅 든 모습을 보입니다. 소극적인 사람이라 그런 점도 있겠지만, 캐롤은 가난한 테레즈와 달리 부자인 데다가 독특한 이름과 성을 가지지도 않았거든요. 게다가 테레즈에게 있어 진정으로 사랑에 빠져본 것은 캐롤이 처음으로 보입니다. 그런 만큼 자신의 마음에 대한 솔직함과 혼란스러움이 뒤섞인 반응을 계속적으로 내비치죠. 캐롤의 집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집안일을 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다 떨어진 담배를 사오겠다고 한다거나 말이에요.

  테레즈는 사진을 찍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백화점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사진작가가 되는 게 꿈이에요. 개인적으로 캐롤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살 때의 눈 내리는 장면, 그리고 그걸 바라보다가 사진기를 꺼내 찍는 테레즈의 모습이 너무 좋았습니다. 뭐랄까,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 레터>를 연상시키는 장면이었어요. 그, 눈 내리는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며 사진 찍는 장면 있잖아요. 느낌은 다르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을 눈과 사진으로 드러내는 부분에서 연상되었던 것 같아요. 이 테레즈의 사진 찍기라는 행위는, 테레즈가 자신을 드러내고 받아들이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에게 그런 행위는 노래일 수도 있고, 글쓰기일 수도 있을 거예요. 테레즈에게는 사진이었던 거고요. 캐롤을 만나고 나서부터 적극적으로 사람들에 관심을 가지고 찍기 시작했고(물론 그 타임즈 다니는 녀석의 말도 있었겠지만), 특히나 캐롤을 수없이 찍었다는 건 그만큼 사랑했다는 거겠지요.

  캐롤은 테레즈에 비해 나이가 많은 만큼 레즈비언으로서의 삶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솔직하고 당당한 사람이지만, 감정에만 솔직하기보다는 사회와의 타협 역시 한 컨에 두고 생각하는 편이죠. 그리고 캐롤은 이미 결혼을 해서 남편과 아이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딸아이의 양육권에 대해 남편과 지속적으로 충돌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캐롤이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는 테레즈의 고민과는 결이 좀 다릅니다. 테레즈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상황이라면, 캐롤은 정확히 인지하고는 있지만 딸을 양육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억눌러야 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남편인 하지 역시 캐롤이 여자를 사랑한다는 점을 알고 있고, 동성애가 정신질환을 취급받던 1950년대 미국에서는 양육권 심리에 있어서도 하지가 우위를 점하게 되지요. 딸을 만나지 못하게 된 캐롤이 테레즈에게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하는 부분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받아들이지만, 하지가 고용한 사람에게 호텔에서 섹스를 하는 상황을 도청 및 녹음당하면서 관계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이것은 캐롤이 불륜을 저질렀으며, 동성애자라는 결정적인 증거물이니까요.

  하지가 잘못을 한 건 사실이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에게도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습니다. 캐롤이 벌인 일은 분명한 불륜입니다. 게다가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닥이던 시절에, 캐롤의 행동을 질병에 의한 것으로 규정하고 그것이 딸에게 미칠 영향을 걱정하는 건 하지에게 있어서 너무나 당연하고 쉬운 행동입니다. 캐롤은 그런 사회의 인식에 대해 알고 있기에, 딸을 사랑하기에, 테레즈에게 이별을 고합니다. 그리고 정신 상담을 받으며 어떻게든 자신이 딸을 키울 능력이 되는 ‘정상인’ 임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테레즈와 함께 하던 시절은 사라지지 않고, 캐롤도 스스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릅니다. “나는 더 이상 나를 부정할 수 없어.” 캐롤이 하지에게 딸의 양육권을 넘기겠다고, 하지만 지속적으로 만날 권리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며, 저런 대사를 뱉습니다.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딸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걸까요.

  본작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연출에 있어서 서로 ‘창’을 통해 바라보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는데요, 영화 전반에는 테레즈가 바라보지만, 후반에는 캐롤이 바라본다는 점도 특기할만한 부분입니다. 서로의 관계에 있어 불투명한 벽이 존재하는 상황을, 그들이 인식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겠지요. 전반부의 테레즈에게는 그것이 캐롤에 대한 열등감일 것이고, 후반부의 캐롤에게는 사회적, 법적인 부분일 것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그 벽을 뛰어넘은 이후에도, 영화는 쉽게 막을 내리지 않습니다. 간단하게 끝내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한데도, 자칫 늘어지거나 지루해질 수 있었음에도, 감독은 이야기를 끝까지 깊게 끌고 갑니다. 캐롤이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테레즈에게 함께 살자고 제안하지만, 테레즈는 이를 한 번 거절합니다. 그리고 친구들과의 파티에 가죠(이 때도 테레즈는 차창 밖을 바라봅니다). 그렇지만 그 파티에서 테레즈는 지루하고 공허해 보입니다. 자신과 사귀었던, 그리고 호감을 표했던 남자들이 다른 여자들과 만나고 있는 모습도 보지요. 이윽고 테레즈는 캐롤에게 가기로 합니다. 캐롤이 마음이 바뀌면 오라고 했던 장소로 가서,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고, 살짝 입꼬리를 올리는 장면에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캐롤>의 해피엔딩은 정말 매력적이지요. 두 사람이 서로를 받아들이는 과정, 또 그 받아들임을 받아들이는 과정까지 섬세하게 그려낸 멋진 작품입니다. 어찌 보면 전형적인 로맨스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이렇게 깊은 울림을 주는 건, 작품 전체에 두 사람의 감정이 무늬처럼 새겨져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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