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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폭력의 무거운 상흔을 째내다 - <벌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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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폭력의 무거운 상흔을 째내다 - <벌새>

크리스탈 크리스 (조은별) 2022. 6. 20. 10:47

김보라 - <벌새>

  샤이니의 종현 씨가 죽었던 때가 생각난다. 나는 샤이니의 팬도 종현 씨의 팬도 아니었지만, 뉴스를 보며 혀를 끌끌 차는 아버지에게 버럭 성질을 냈었다.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던 사람이 누구도 모를 고독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다가, 그렇게 덧없이 사라지는 것. 나는 그 상황에, 자신의 감정이 요동치는 것에, 왜 내가 그러한지에 대한 이유도 모른 채 그저 슬프게 울었다.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의 후반, 조용하게 퍼지는 성수대교 사건의 파장을 마주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때의 감정, 감각, 느낌이 떠올랐다. 당시 이 영화를 세 번째 보는 중이었다(개봉 당시 영화관에서 두 번 봤다). 이전에 봤을 때도 이러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남겠지. 과거에 적은 글을 전혀 찾을 수 없으니.

  <벌새>는 소녀 은희의 이야기다. 은희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다른 말을 찾을 수 없다. 서사 속에서 끄집어 낼 수 있는 부분 부분의 이야기는 정말 많지만, 영화는 그것들을 그저, 은희의 시점에서 담담하게 늘어놓는다. 서사는 흐르고, 은희는 상처를 받고, 또 상처를 준다. 이유 없이 반에서 문제아로 찍히거나, 오빠에게 이유 없이 맞으며 살거나, 아무것도 모른 채 고독과 두려움에 떨게 되는 순간들을 마주한다. 그런가 하면 선생 뒷담도 까고, 애인에게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애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해어졌다 만나기를 반복하고, 상가에서 도둑질을 하기도 하고, 절친과 속내를 나누기도 배신당하기도 화해하기도 하고, 부모님 몰래 집을 드나드는 언니를 도와주기도 한다. 은희는 착하고 순수하게만 비치는, 그런 소녀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게 은희가 착하고 순수하지 않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은희가 처하는 상황, 은희의 감정, 은희의 행동, 그것들을 관객들이 이해하기를 바란다. 은희를 동정하거나 욕하거나 실드를 치거나, 그런 것들은 영화가 혹은 감독이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오직 온전한 이해를 시도하길 바랄 것이다.

  재개발로 사람들은 쫒겨났고, 부실공사로 성수대교는 무너졌다. 국가는 모든 개인의 안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다수를 위할 뿐이다. 가족도 온전한 안전울타리가 되어 주지는 못한다. 때로는 가족이 오히려 폭력이다. 은희 귀 아래에 혹이 생긴 건 그러한 폭력을 ‘들어온’ 것에 대한 상징이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은희가 입은 상처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칼로 자르고 빼내야 할 정도이고, 흉터마저 남는 것이라는. 결국 오빠에게 고막이 찢어지고서야 은희의 상처를 알게 된 아저씨 의사가 진단서는 증거가 되니 필요하면 말하라고 하는 장면은, 내부의 문제라고 그 안에서만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문 학원 영지 선생님은 은희에게 묻는다. 얼굴을 아는 사람에 비해 마음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되느냐고. 그래, 결국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서 은희가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남을까. 서울대를 휴학한, 노동가를 부르던, 누구보다 은희를 이해해주는 것 같던 영지 선생님은 모든 걸 이야기해 주겠다는 편지를 보냈지만, 그 편지를 은희가 받았을 때는 이미 성수대교 사고에 휘말려 세상을 뜬 뒤였다. 나는 생각한다. 과연 영지 선생님이 은희에게 모든 걸 이야기했을 때 은희가 선생님을 이해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에 대해서. 조금 비평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질문이 이 영화에서 영지 선생님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야 밝은 여운을 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영지 선생님의 완전한 이해자-조력자 포지션은 서사적인 비판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날을 세우고 말할 생각은 딱히 없다. 어린 영희의 시선에서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것만 같은 영지 선생님은, 그렇게나 완벽해 보일 수밖에 없을 테니.

  슬슬 마무리하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캐릭터가 맘에 들었던 건 은희, 그리고 은희를 좋아하던 후배였다. 그리고 이 영화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또 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김보라 감독의 다음 작품이 기대가 되는데, 부디 좋은 차기작들을 내주셨으면 좋겠다. 그래야 더 좋은, 더 다양한 영화들이 나올 발판이 생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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