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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탄생과 소녀의 성장 - <해수의 아이> 본문
이가라시 다이스케 원작, 와타나베 아유무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해수의 아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비교적 명확합니다. 동화적인 성장 서사를 통해서 생명의 탄생을 그려내는 것. 이 이야기의 구조는 크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생명’의 정의 자체가 철학적이고, 곳곳에 다양한 상징들이 배치되어있는 데다가 극 후반의 전개는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시적이고 광활한 묘사로 이루어져 있기에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뉠 운명을 타고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하지만 애니메이션이기에 가능한 시도였고, 이는 분명 성공적이었다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제 마음 한 구석에 분명 오래 남을 작품입니다.
극 초반부, 주인공 루카의 여름방학은 최악의 시작을 맞이합니다. 핸드볼 부에 소속되어 있던 루카는 방학의 시작이라며 의욕 넘치는 열의를 보여주지만, 루카의 그런 모습이 미음에 들지 않았던 아이가 태클을 걸어 넘어뜨리고, 그 아이를 루카가 팔꿈치로 가격하게 되면서 결국 연습에 나오지 말라는 선언을 듣고 말지요. 악에 받쳐 경사진 하굣길을 위험하게 내달리다가 결국은 넘어지고 마는 루카의 모습, 그것을 롱테이크로 보여주는 장면은, 루카가 얼마나 분한지를 급박한 표정과 행동으로 묘사합니다. 하강, 넘어짐, 그리고 다시 걸어가는 루카. 루카는 날지 못하게 되었다고 건조하게 독백합니다.
루카는 말하자면, 요령이 없는 아이입니다. 좋아하는 걸 열심히 하고 또 잘 하지만, 계획적인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과하게 반응하고, 선생이 시키는 대로 사과하고 수습하기에는 너무 분하고, 그렇다고 특별한 대책을 내지도 못하는. 착하고 또 감정적인, 그렇기에 쉽게 궁지에 몰리고 왕따가 되어버리는. 그런 아이.
걸 밋 보이, 라고 할까요. 상처 입은 루카가 충동적으로 향했던 아버지의 수족관, 그곳에서 루카는 물속을 마음대로 헤엄쳐 다니는 한 남자아이를 만나게 됩니다. 우미라는 이름의 그 아이는 듀공에게 길러졌다고 하는데, 어째선지 다음 날 학교 교실에 숨어있는 루카를 발견해내고는 바닷가로 이끌어, 운석(본인은 도깨비불이라고 부르는 것)이 떨어지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후 우미의 형인 소라와 만나고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야기는 본격적인 전개가 시작됨을 암시하죠.
우미, 그리고 그 형인 소라. 두 사람은 각자 바다(우미)와 하늘(소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검은 피부의 우미와 하얀 피부의 소라는 전혀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지요. 이들은 세계 전체를 은유합니다. 대척점의 이름과 외모, 하지만 그들은 형제입니다. 그들이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 바다에서 온 형제와 지상의 소녀 루카가 가진 ‘다름’을 뜻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두 성별이라는 다양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른 위치, 하지만 함께 어울리며 결과적으로 다양한 정체성과 위치를 가지는 동시에 하나로 이어지는 자들이 ‘탄생제’라는 바다의 축제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벌어지는 ‘탄생제’의 비밀을 밝혀내려는 과학자들, 이들을 이용해 해양 개발의 주도권을 쥐려는 권력자들. 하지만 과학은 소라와 우미의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규명해내지 못합니다(소라는 이 현상을 ‘몸이 재구성되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들에게 보이는 것은 한정적입니다. 이를 한탄하는 소라에게 앙글라드는 이렇게 말하죠. 우주의 거의 대부분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암흑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요. 과학이 발전해서 알게 된 것은 규명 불가능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뿐.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은 우주 전체의 10퍼센트도 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축제의 전조는 세계 곳곳에서 인간들에게 관측됩니다. 맨해튼에 나타난 고래, 육지로 올라온 심해어, 해양학자들에게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송(고래의 노래)’도 들려옵니다. 이윽고 소라마저도 때가 되었다며, 루카에게 가지고 있던 운석 조각을 넘겨주고 사라져 버립니다. 데데 할머니는 바다 전체가 움직이고 있다고 독백합니다.
루카의 엄마인 카나코가 수족관에서 일하던 전설의 조련사였다는 것, 루카가 본 ‘바다의 유령’. 루카가 ‘송’을 듣고 보인 반응, 그리고 ‘코모리우타(자장가)’의 전승. 어릴 적에 바다에서 온 소년을 만났다는 데데 할머니. 이들의 단서를 이어보면 루카가 어느 바다 일족의 피를 이은 소녀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또한 ‘루카’는 인명으로도 쓰이지만 생물학 용어 LUCA, ‘모든 생물의 공통조상’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는 앙글라드가 극 후반에 말하는, 인간을 비롯한 전지구의 생명체는 우주에서 왔으며, 인간과 우주는 닮았다기보다 같은 존재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앙글라드는 우주와 바다가 닮았다는 말도 하지요.
별의, 별들의, 바다는 낳아준 어머니(자막은 ‘낳아준 어머니’인데, ‘우미오야’라고 하는 걸 보면, 직역했을 때 ‘바다 어버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극 중 내내 여러 번 등장하는 시구는 이런 구절입니다. 이는 바다가 별의 어머니라는 말로 풀이됩니다. 앙글라드의 말과도 연결해보면, 즉 우주는 바다이고 별이고 인간이라는 말이 됩니다. 인간의 몸 자체를 하나의 세계로 보는 것, 또 우주 전체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는 것이 이 작품 전반의 시선입니다. 소라가 기억과 사고의 발생과정은 우주의 탄생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바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과 감정을 느끼는 데데와 루카의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비가 내리고 태풍이 부는 시간 속에서 루카의 주위를 떠다니는 물고기들의 형상도, 태풍이 소라의 위치를 알려줬다는 우미의 말도 결국은 한 가지를 의미합니다. 전 지구의 생명들의 기억은 물과 바람을 타고 전해지며, 바다의 기억은 태풍과 빗줄기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파도를 통해 전해지는 정보들이 우미, 소라, 루카에게 느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죠. 인간은 세계의 일부라는 것. 우주의 입장에서 우리 인간은,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인간은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제일 잘난 생명체 따위가 아닌 겁니다. 그저 지구의 일부이자 세계 혹은 우주의 일부. 태어나고 또 사라지는 덧없는 존재이지만 기억을 통해 전승되고 이어지는. 동시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라는 것. 이러한 작품의 철학을 후반부의 전개는 시적으로 전달해줍니다.
바다는 생명의 원천이자 그들을 품는 자궁이고, 운석은 우주로부터 온 정자입니다. 소라는 루카에게 운석을 전달했고, 루카는 운석을 깨웠으며, 그 운석을 전달받은 우미는 별이 되었습니다. 소라도 우미도 이 세상, 이 우주의 일부가 되어 루카의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축제의 게스트였던 루카만이 길고 긴 여름을 끝내고 다시 바닷가 마을의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등교하는 길, 루카는 항구를 지나치다 데데 할머니의 노래를 듣습니다. 그때 데데 할머니는 루카에게 자신도 루카와 같은 것을 겪었다고 말해주며, 자신이 겪은 일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만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며 울고 마는 루카를 위로해줍니다. 그 아이들을 믿으라고. 너의 손바닥 안에도 이야기가 숨어 있다고. 루카는 눈물을 닦고 힘차게 오르막길을 오릅니다. 그러다가 학교에서 굴러 떨어지는 배구공을 잡게 되는데요, 자신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던 아이가 공을 주우러 나왔다가 루카와 마주치게 됩니다. 힘껏 공을 던져 주며 루카는 독백합니다. 그곳에도 하늘(소라)과 바다(우미)가 있었다고요. 말하자면 그곳에도 세계-우주-개개인의 이야기가 존재하고 있다고요.
이 이야기는 성장 서사이자 생명의 탄생을 그린 시입니다. 서툴렀던 루카가, 분해하며 내리막길을 뛰어내려오다 넘어졌던 루카가 다시 그 길을 뛰어올라가기까지. 껄끄러운 만남과 다시 마주하기까지. 어쩌면 솔직한 마음을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루카의 성장이자 재탄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동시에 실제로 하나의 별이, 생명이 탄생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한 개인은 그 자체로 우주이자 거대한 세상의 일부, 즉 모두가 하나이면서 전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요네즈 켄시의 노랫소리와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고 난 후의 에필로그에서, 루카는 좀 더 성장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엄마는 루카의 동생을 출산했고, 루카는 그 탯줄을 자릅니다. 생명을 끊는 감촉이었다는 독백. 그리고 루카는 엄마에게 묻습니다. 자장가를 할머니에게서 배운 거냐고요. 엄마는 그렇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지막 장면, 루카는 해변가를 맨발로 걸으며 파도를 느낍니다. 자장가를 부르면서요. 그리고 독백합니다. 항상 몸속 깊은 곳에 잘 연결되어있어. 가장 중요한 약속은 말로는 나눌 수 없지. 어쩌면 이것은 부모와 자식의, 인간과 우주의 연결을 은유하는 마무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죠, 가장 중요한 것들은 쉽게 말이 되어 나오지 않지요. 말하지 않아도, 마치 고래의 노랫소리 같은 것으로 통하는 무언가가 있지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본작이 이야기하는 인간과 우주에 대한 철학이 저의 그것과 상당히 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정말 짜릿한 경험이었습니다. 이걸 이렇게 풀어낼 수 있구나. 뭔가 과한 듯이 보이는 설정을 매력적인 캐릭터와 아름다운 장면들, 짜임새 있는 이야기로 풀어내는구나. 물론 다섯 권짜리 원작 만화를 축약한 것이니만큼 개별 캐릭터의 서사를 하나하나 풀어내지 못한 부분과 개연성 면에서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 아쉽기는 합니다. 캐릭터 각자의 서사가 좀 더 풀렸다면 그들 각각의 대사가 더 깊게 울릴 수 있었을 텐데요. 물론 이걸 TVA로 만들자는 미친 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이건 극장판이기에 가능한 시도고, 그렇게 길게 만들면 이 작화의 절반은 살릴 수 있을 런지 모르겠습니다. 뭐 이건 그냥 아쉬운 소리에 불과해요. 작품 자체가 워낙 좋아서 할 수 있는 그런 푸념이죠. 아 원작 사버렸어요.
그것이 무엇이든, 창작자가 정성을 쏟은 좋은 작품에는 영혼이 깃든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 영혼은 아마 그것과 유사한 질감과 농도의 영혼을 가진 사람에게 가닿는 것이겠죠. 제 영혼의 친구 같은 작품을 또 하나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PS. 본작의 감독이 제가 좋아하는 TVA 작품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감독이더라고요. 이것도 만화 원작! 처음에는 소재 면에서 편견을 가지고 들어갔는데 정작 보고 나니 너무 아리고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이야기도 작화도 연출도 음악도!
PS.2. 요네즈 상 정규 5집 너무 좋아요! 한국 라이센스 반도 나왔으니 한 장쯤 구매해보시는 것도? 저는 샀습니다!
PS.3. 루카 진짜진짜 너무너무 귀여워ㅠ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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